하드보일드 트립

책 표지


하드보일드 트립 

낭만도 위로도 없는 유라시아 횡단기

저자김귀선  저 
출간일2026년 03월 11일
가격18,000원
크기127 * 188 * 19 mm / 400 g
페이지224쪽
ISBN9791168265578

도서 소개

낭만도 위로도 없는 700일의 유라시아 여행기 

맨몸으로 통과하며 체득한 내면의 두려움을 마주하는 법 

『하드보일드 트립』은 〈2025 NEW BOOK 프로젝트-협성문화재단이 당신의 책을 만들어드립니다〉 선정작으로, 관광 정보나 감상 위주인 일반적인 여행서와 다르다. 이 책은 무심하고 불합리한 세계를 맨몸으로 통과하며, 불가해한 삶을 이해하려 애쓰는 먼지투성이 여행 에세이다. 저자는 낯선 도시 사이를 유랑하며 매일 결정을 내려야 한다. 오늘의 잠자리와 내일의 교통편, 다음 국경과 누구를 믿을지까지. 길은 험하고, 날씨는 요지경이며 도움은 늘 조건부처럼 보인다. 어째서 저자는 낯선 땅에서 위험을 겪고도 계속 가는가. 이 끝없는 여행은 무엇을 증명하기 위함인가. 세상 끝까지 가는 동안 저자는 도움을 받기도 하고 거절당하기도 하며 생존의 요령을 몸으로 익힌다. 그러나 진정으로 손에 남는 깨달음은 위로나 낭만이 아닌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는 자기 기준, 곧 자기 신뢰의 근거다. 길 위에서 흔들렸던 까닭은 세상이 유난히 냉혹해서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려고 했기 때문이다. 위험과 불합리 앞에서 어떻게 버티고 통과했는지 저자는 그 과정들을 과장 없이 쌓아 올리며, 버틴다는 것이 결국 세계와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 안의 두려움과 끝까지 마주하는 일임을 보여준다.


목차

  • [시작하며]
    지금 떠나지 않으면 미칠지도 몰라 06

    [1. 떠나다_일상을]
    길을 잃고서야 시작된 질문 17
    나를 자유롭게 하는 힘 24
    아니, 나 혼자 여행이야 32

    [2. 겪다_세계를]
    시베리아 횡단 열차, 괴팍한 승무원을 만났다 45
    황금색 롤스로이스가 남긴 세 가지 울림 57
    가난한 운전자와 히치하이커 68

    [3. 통과하다_위기를]
    바이칼에서 지갑이 몽땅 사라졌다 83
    유럽 자전거 캠핑 노숙의 맛 95
    국경에서 사라진 시간과 기억 103
    터키에서 들개에게 공격당했다 119

    [4. 마주하다_사람을]
    장대비 속에서 나타난 천사들 131
    여행자를 돕고 싶어 안달난 사람들 141
    소심한 엑세서리 노점상과 20달러 152

    [5. 돌아보다_운명을]
    난감한 밤이 완벽한 밤으로 169
    위험한 날이 운수 좋은 날로 185
    나도르 가는 길 197

    [맺으며]
    내 안의 성소를 찾아 떠난 순례 208

저자 소개

김귀선

세상에 대한 넘치는 호기심으로 대학 시절부터 홀로 배낭을 메고 세계 곳곳을 누빈 길바닥 여행자. 유라시아 대륙횡단, 히치하이킹, 자전거 여행, 오지 탐험 등 50여 개국을 방랑하며 다양한 지구인들의 삶과 얼굴을 가까이에서 기록해 왔다.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부와 경희대학교 한약학과를 졸업하고, 다국적 제약회사 아스트라제네카를 거쳐 현재는 한약사로 일한다. 여행과 사람, 생존과 용기에서 길어낸 결로 사람의 이야기를 장편 서사로 빚고 있다. 길은 말해준다. 가장 강한 서사는 사람이라고. 2023년 우수출판콘텐츠에 선정된 『자전거를 타지 않는 우즈베크 여자들』은 『하드보일드 트립』이 탄생하기 전의 시간을 담은 작품이다.



🖋 책 속으로

p.6 직장 5년차, 어느 날 새벽이었다. 출근하려고 눈을 떴는데 이유 없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번아웃이었다. 몇 달 전부터 조짐이 있었다. 일에 대한 열정, 삶의 호기심이 언제부턴가 희미해졌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였다. 인생이 시시하게 저물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을 살다 그대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나는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삶의 방향을 틀기로 했다.

p.22 가슴속에서 ‘이 길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 때마다 페달을 밟아 뭉개버렸다. 생각하는 시간마저 아까웠다. 가다 보면 목적지가 나올 거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미친 듯이 달렸다. 그 결과가 이거다. 어딘지도 모르는 낯선 길바닥.

p.29 인생은 결국 순간의 선택들이 쌓여 만들어진 지도다. 그중에서도 여행은 그 선택의 밀도가 가장 높은 시간이다. 낯선 길 위에서의 선택은 위험했고, 그만큼 예민했다. 머리에 쥐가 나도록 시뮬레이션 해 본들 다음 순간을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

p.36 여행 중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단연 이거였다. “여자 혼자 위험하지 않아?” 이 질문의 빈도는 “너는 노스 코리아 김정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와 막상막하였다.
대답은 늘 같다. 당연히 위험하다. 익숙지 않은 곳은 누구에게나 위험하다. 이불 밖은 다 위험하다는 거,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나? 우리는 흔히들 성범죄나 폭력이 여성만의 공포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길 위에서 만난 남자들의 이야기는 달랐다.

p.55 불현듯 괴팍했던 그 시베리아 열차 승무원이 떠올랐다. 그땐 그녀가 왜 화가 났는지 몰라 일종의 인종차별인가 의심했다. 단지 그녀는 웃지 않았을 뿐이다. 평소에도 다른 승객에게 무뚝뚝하고 투박하게 말했다. 나에게 웃지 않으니 화가 난 거라 단정했고, 거친 말투에 꾸짖는다고 착각했던 거다. 비로소 작별할 때 그녀가 보인 태도가 이해됐다.

p.64 사람에게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삶의 패러다임이 뒤집히는 경험이 있다. 삶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순간, 즉 자신만의 변곡점이 찾아온다. 익숙한 세계를 깨고 날것의 잠재력과 직면하는 이 경험은,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만큼 강렬하다.

p.70 이런 이유들로 나는 애초에 동남아에선 히치하이킹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는 기어코 모험을 계속한다니 나의 피가 끓었다. 사실 버스나 비행기 여행은 순탄했지만 지루했다. 창밖 풍경도 잠시, 이내 졸고 시간만 때웠다. 나는 가출한 히치하이커의 열정을 불러들였다. 준비? 그런 건 없다. 때만 오면 길 위에 서기만 하면 된다.

p.83 시베리아의 한복판, 바이칼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5월에도 살을 에일만큼 차갑고 매서웠다. 잠을 자다가 한기에 눈이 번쩍 떠졌다. 발이 시려 수면양말을 꺼내려 배낭을 뒤졌다. 없다. 어라? 이쪽저쪽 모두 뒤졌지만 보이지 않았다. 손에 식은땀이 맺히며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주머니는 단순한 양말 꾸러미가 아니었다. 반년 치 경비와 은행카드가 든 여행자금 파우치였다. 얼굴로 피가 쏠리며 잠이 확 달아났다. 랜턴을 몽땅 켜고 배낭을 거꾸로 털었다. 큰일이다. 없다-감쪽같이 사라졌다.

p.102 인터라켄에 도착하자마자 자전거는 대충 던져두고 아기자기한 시내를 한 바퀴 휘 돌며 구경했다. 마침 강가 산책로에서 벤치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오늘의 숙소는 여기다! 배낭을 베개 삼아 눕고 침낭 지퍼를 머리끝까지 당겼다. 산책하는 사람들의 인기척이 이따금 들렸지만 알 게 뭔가. 나는 태평하게 잠을 청했다.

p.111 차가 출발하자 긴장이 풀리며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뒷좌석에는 수갑 찬 남성 피의자가 앉아 있었다. 치렁한 금발에 듬성듬성한 머리숱, 민소매 조끼 차림. 50~60대쯤 돼 보이는 그 남자는 내 얼굴을 보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범죄자의 눈에도 나는 대책 없는 신세였다.

p.122 그 순간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멀리 잡초 사이에 개 무리가 보였다. 본능적으로 방향을 틀어 도로 쪽으로 이동했다. 녀석들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먼 거리였다. 괜찮겠지 싶던 찰나, 한 마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녀석은 원수라도 발견한 듯, 갑자기 잡초를 헤치며 나를 향해 미친 듯 달려오기 시작했다. 재빨리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몸을 숨길 곳도 없었다. 나는 오직 혼자였다.

p.132 하지만 떠나지 않으면 다시 길 위로 돌아갈 용기가 사라질 것 같았다. 결국 마음을 다잡았지만, 떠날 결심과 떠나는 일은 별개의 문제였다. ‘이제는 가야 한다’며 배낭을 꾸려놓고도, 나는 계속 멈칫했다. 출발은 아침이 아니라 정오를 훌쩍 넘겨 버리고 말았다. 해는 이미 한낮의 열기로 번들거렸고, 그림자는 짧았다. 이 시각에 길을 나선 히치하이커라니, 운도 패기도 없었다. 더 미루면 오늘 안에 도착은커녕 길바닥에서 잘 판이었다.

p.151 오늘 하루도 무사히 살아냈다. 낯선 여행자를 돕지 못해 안달인 따뜻한 사람들 덕분에 침대에 누운 순간, 가슴 가득 벅찬 감정이 차올랐다. 누군가는 포기한 꿈을 나는 여전히 이어가고 있었다. 잘 되든 못 되든, 계속해 나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운이 좋은 게 분명했다.

p.165 코펜하겐에서 그 어느 때보다 외롭고 기운 빠진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심장은 수시로 두근거렸다. 이 차가운 도시에서 기댈 곳 하나 없다고 느꼈다. 숙소는 이미 만석이라 내일 잠잘 곳조차 불투명했다. 도시는 여전히 환하고 활기찼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 초라했다.

p.173 크라쿠프 당일 도착 계획은 이미 틀어졌다. 그래도 그간 내가 얼마나 운 좋게 달려왔는지 떠올렸다. 히치하이킹을 시작한 지 3주, 초심자의 행운이 바닥날 때가 됐다고 중얼거리던 그때- 클락션이 빵 하고 울렸다. 설마? 배낭을 들쳐메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빨간 스포츠카가 기다리고 있었다.

p.190 GPS가 없으니 내가 어디쯤 있는지, 다음 휴게소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이마와 손바닥에 식은땀이 번졌다. ‘이대로 고속도로 지박령이 될 수는 없지.’ 가든가, 말든가, 뭐라도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결심했다.

p.197 2002년 여름, 네 번째 수험에 실패한 나는 생명과학부에 들어가 있었다.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가 괴로웠고, 앞길이 막막했다. 인생의 방향을 정해야 했다. 생각 끝에 전국 자전거 무전여행을 계획했다. 서울을 떠나 남도를 거쳐 제주 일주로 마무리하는 여정이었다. 준비물은 접이식 자전거, 손바닥만 한 지도, 판초우의, 노랗게 염색한 머리뿐. 사람은 무식하면 용감해진다.

p.216 길바닥을 떠돌며 나는 새로이 현명해진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깃들어 있던 것들을 비로소 알아보는 눈과 마음을 얻었을 뿐이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난데없는 사건들은 내 깊은 곳의 지혜를 비추는 거울이자, 잠자던 깨달음을 끌어올리는 마중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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