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


책 표지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

경계의 시간, 이름 없는 시절의 이야기

저자허태준 저 
출간일2020. 11. 22
가격14,000원
크기125 * 188 * 24 mm / 269 g페이지272쪽
ISBN9791190971102

도서 소개

삶에 대한 이야기는 없는데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올해는 스물두 살의 나이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라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50주기가 되는 해이다. 우리의 현실은 그때보다 얼마나 나아졌을까.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고작 열여덟, 열아홉 살 나이의 청년들을 위험한 일터로 내몰고 사람이 죽는 사고가 나도 나 몰라라 하는 기성세대들의 모습은 별로 달라진 바 없다.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 정비업체 직원 사망사고, 2017년 제주 현장실습생 사망사고,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 사고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많은 비극적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현장실습생/청년노동자에 관한 이야기가 재조명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똑같은 사고가 다를 바 없이 반복된다. 어떤 삶은, 죽음을 통해서라야 겨우 제 존재를 드러내지만 그마저도 곧 신문과 뉴스에 파편화되어 흩어지는 정보로 남을 뿐이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 사회 현장실습생/청년노동자의 열악한 처지를 그대로 반영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포함해 노동 담론 안에서도 더 잘게 계급화 되고 있는 오늘날의 노동 문제 속에서도 가장 열악한 처지에서 삶을 버텨야 하는 이들은 어쩌면 10대의 고졸 노동자들일지 모른다. 전태일 열사는, 대학생 친구가 한 명만 있었다면 좋았겠다고 처연하게 독백했지만 지금은 대학 진학이 당연하게 여겨질 만큼 흔한 시대다. 그럼에도 집안 형편을 비롯해 저마다 다양한 이유로 마이스터 고등학교 진학을 거쳐 곧바로 사회로 나오는 청년들이 여전히 많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 개개인의 사연에 별로 귀 기울이지 않는다. 취업률에 따라 지원금이 달라지는 국가 정책과 그 속에서 아무렇게나 방치되는 아이들. 이들이 맞닥뜨리는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첫 사회생활은 사회에 대한 신뢰를 여지없이 깨뜨린다. 대학을 진학하지 않은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꿈과 적성을 고민할 틈도 없이 공장에서 하루의 시작과 끝을 맞이해야 하는 반복되는 일상. 늘 누군가가 죽을 때라야 주목받는 이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여 보면, 죽음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여러 환경과 조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는 우연히(?) 살아남은 이들에게도 커다란 아픔이 있음을, 더 나아가 평생의 트라우마로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사회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찾아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어떤 영화나 드라마, 소설이나 만화에서도 이십 대는 다 대학생이었고, 직장인은 모두 양복을 입고 있었다. 작업복을 입고 공장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구전으로나 전해지는 동화 같았다. 누군가의 경험담으로 가늠해보는 게 최선이었고, 그마저도 모호하고 비어있는 부분이 많았다.” - 본문 中

노동 현장의 안전문제에 관한 관심이 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 현장실습생과 청년노동자에 관한 이야기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누군가 이들의 언어를, 이들의 목소리를 가져간 것은 아닐까.『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는 현장실습생/청년노동자 당사자의 진솔한 목소리를 담은 최초의 책이라고 해도 좋겠다. 죽음 너머에 있는 삶에 관한 이야기를 담담한 시선으로 그려내며, 자신과 주위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현장실습생/청년노동자가 겪는 다양한 일들을 그야말로 생생하게 들려준다. 저자는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를 차분하고 정갈한 문장으로, 어떤 면에서는 역설적인 담담함으로 들려준다.

“‘청년노동자에 관한 이야기를 쓰자’라고 생각한 건 2년이 넘은 것 같아요. 저 스스로가 청년노동자이기도 했고, 당시에 일어났던 태안화력발전소 사고 등을 보면서 현장작업자에 대해 우리 사회가 너무 무관심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자연스레 그 이유가 뭘까, 왜 이런 사건이 계속 일어나도 사람들은 이리도 냉정할까 고민하게 됐죠. 사고를 당한 사람한테는 목소리나 이야기가 없어요. 비극적 존재로, 불행의 서사로, 그냥 박제되는 거죠. 그 이야기를 돌려주고 싶었어요. 삶에 대해, 아주 사소한 사건이나 마음의 변화에 대해, 우리가 함께 지나온 시절에 관해 쓰고 싶었어요.” - 저자 인터뷰 中

일하는 청(소)년, 대학생이 아닌 이십 대, 군인이 아닌 군 복무자로 살아온 경계의 시간
저자가 보고 들었던, 이름 없는 시절에 관한 이야기

대학생이세요? 직장에 다니고 있어요. 나이가 어떻게 돼요? 스물 셋이에요. 군대는 다녀온 거예요? 산업기능요원으로 복무하고 있어요. 네? 방위산업체 비슷한 거예요. 그런 건 근무 조건이 나쁘지 않아요? 그냥 일반 사원이랑 비슷해요. 아, 그렇구나.

저자는 기계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장실습생을 거쳐 산업기능요원으로 지역 중소기업에서 3년 7개월간 근무했다. 저자는 그 시절 자신에겐 명확한 이름이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특성화/마이스터 고등학교에 입학해 현장실습생으로 중소기업에 취업한 후 같은 회사에서 산업기능요원으로 편입하여 대체복무를 하고 있는 노동자’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우리 사회에 존재하지 않았다. ‘청년노동자’라고 묶어 부를 수도 있었지만 그 뒤로는 역시 긴 설명이 따라와야만 했다.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 내가 써도 괜찮은 건지에 대한 부담이 많았어요. 저라는 사람이 현장에서 일하는 수많은 청년노동자를 대표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스스로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내 글이 어떤 ‘필요’를 가지고 있을까, 많이 고민했어요. 그렇다면 조금 더 감정에 관해 이야기하자, 당사자로서 보고 들었던 사소한 사건 혹은 나와 주변 사람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조금 더 드러내보자, 그런 생각을 했어요. 부담이나 걱정도 있었지만, 솔직한 글이 가장 좋은 글이 될 거라고 믿었어요. 실제로 그것밖에 쓸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고요.” - 저자 인터뷰 中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존재를 증명 받을 수 있다. ‘대학생’, ‘군인’, ‘직장인’, ‘사회초년생’이라는 말 안에는 굳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할 정도의 서사가 녹아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그럴 수 없었다. 일하는 청(소)년, 대학생이 아닌 이십 대, 군인이 아닌 군 복무자였던 저자는, 어느 쪽으로도 완전히 넘어가지 못한 채 경계 위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누군가의 인생을 그렇게 마주할 때면, 나는 기숙사 침대에 누워 발화되지 못한 이야기에 대해 생각했다. 여기에 삶이 있다고, 우리 모두 분명하게 살아있다고 외치고 싶었다. 당신도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누가 당신의 목소리를 가져갔을까. 누가 당신에게서 언어를 가로챘을까. 나는, 당신에게 이야기를 돌려주고 싶었다. 당신과 내가 함께 지나왔을 그 시절의 이야기를, 우리 모두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 본문 中


그들은 우리 사회의 청년이자 노동자였다
항상 연결되어 있는 우리가 함께 지나왔을 그 시절의 이야기


또래들이 요약 노트, 암기 노트 등을 만들어 입시를 준비할 때 저자는 범용 선반, 복합 밀링, 탁상 드릴링 머신, 고속 절단기, 탁상 그라인더, 공구 연삭기, 용접기 등 낯선 기계와 마주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업무일지를 작성했다. 저자는 열여덟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쇠를 깎고, 욕설과 폭력이 아무렇지 않게 오가는 관계 속에서 억울함을 꾹 참으며 힘겹게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을 사정이 있어 집으로 모두 보내야 할 때마다 저자는 온갖 지식이나 경험, 기회 등을 갖지 못한 자신에게 돈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ATM기 앞에서 울적이며 심란한 마음을 한참이고 삭히기도 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자신이 당했던 부조리, 억울함, 서러움을 토로하며 특정인을 저격하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보다 자신 혹은 주위 사람의 이야기를 담담히 들려주며 우리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끊임없이 서로를 구분 짓고 경계하기보다는, 같은 결을 따라 유사한 형태의 폭력과 상처를 보듬어나가는 사회를 꿈꾼다. 타인을 구하는 일이 결국 자신을 구하는 일이라는 신념 아래, 저자는 나와 당신은 다르지 않다는 말을 조금 더 쉽게 말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며 비난 너머에 있는 한 줌의 온기와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 속에는 어느새 20대 중반이 되어 사회에 하나둘 자리 잡아가고 있는 또래와, ‘산업 역군’이라는 교묘한 단어에 가려진 채 오늘도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는 현장실습생/청년노동자들을 글로서 지키고 싶다는 저자의 진솔한 마음이 담겨 있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내가 쓰는 이유는, 어쩌면 글쓰기가 그들을 지켜줄지도 모른다고, 홀로 상처받는 이들에게 한 줌의 다정함을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나는 당신이 상처받지 않도록 글을 쓸 것이다. 글은 내가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오해가 오해를 만들더라도, 그 속에서 영원히 아파한다고 해도, 우리가 마주 잡은 손은 따뜻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강해질 필요는 없다. 더 약해져도 괜찮다. 그저 부은 눈을 꼭 감은 채로, 당신이 긴 새벽을 견딜 수 있었으면 좋겠다.” - 본문 中

책은 크게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1장은 ‘현장실습생’으로 겪은 혼란과 학창 시절의 추억이 담겨 있다. 책에서 가장 감정적이고 치기 어린 부분이다. 하지만 ‘불안’은 저자의 어린 시절을 관통하는 중요한 정서 중 하나였다. 그만큼 저자의 솔직하고 가감 없는 이야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2장에서는 ‘산업기능요원’으로 저자가 회사에 다니며 있었던 크고 작은 사건과 갈등을 이야기한다. 관계도 사회생활의 일부라면, 우리 모두가 더 성숙한 태도로 타인을 대해야 한다는 걸 말하고자 한다. 더불어 군 복무 과정에서 마주했던 차별과 편견에 대해서도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빌려 자세히 다루고 있다. 마지막 3장에서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문제가 얼마든지 사회 전체로 확장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누군가는 ‘현장실습생’과 ‘산업기능요원’이 다른 삶을 선택한 개인일 뿐이며 그들의 문제는 다소 특별하고 예외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은 우리 사회의 청년이자 노동자였고 그들의 문제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 연결되어 있었다.

“같이 고등학교에 다니며 취업을 고민했던 친구들. 지금은 직장이나 대학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친구들. 그들의 곁을 지켜주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의 상처를 받을 때 기댈 수 있는 책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현장작업자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그들에 대해 알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요. 다른 종류의 삶이, 어린 나이에 일을 하게 되는 친구들이, 도시 밖에 모여 있는 공업단지처럼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라도 기억하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 저자 인터뷰 中



〈편집후기〉

저자와의 인연은 2018년 말, 출판계에서 셀럽이라 불리는 어느 유명 작가의 강연장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유명 작가를 섭외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한 패기 넘치는 신입 편집자였던 나는, 작가에게 포스트잇으로 질문했다. “혹시 돈 걱정을 하지 않고 꼭 써보고 싶은 글이 있나요.” 유명 작가는, “특성화고를 졸업하고 일을 시작한 현장실습생을 다룬 글을 쓰고 싶다”고 답변했다. 알고 보니 그 자리에 저자가 스텝으로 있었다고 한다. (본문 113p) 당시 유명 작가는 은유 작가님이고 실제로 2019년 6월, 현장실습생 문제를 다룬 르포 인터뷰집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돌베개, 2019)이 출간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저자와의 첫 만남 이후 2년이 지났고, 그사이 지난한 과정을 거쳐『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라는 책을 세상에 내보낼 수 있게 되었다.

현장실습생을 경험하지 않은 편집자가 현장실습생 이야기가 담긴 책을 편집하는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누군가에겐 특혜이자 권리라는 걸 깨닫는 순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는 불편함은 필연적이다. 그 불편함은 두려움으로, 부끄러움으로 번지곤 했다. 이러한 감정들은 한편으론 이 책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할 수 있게 한 강력한 동기이기도 했다. 이번 작업을 통해 현장실습생/청년노동자로 살아온 한 사람의 인간을 알게 되었고, 이는 곧 집단 혹은 숫자로 표현되는 동안 자연스레 삭제되었던 한 명의 개인을 복구시키는 일이었다. 책을 만들어 판매한 돈으로 밥을 벌어 먹고사는 편집자에게 일말의 쓸모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신과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누군가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그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는 일일 것이다. 이번 책의 첫 번째 독자였던 나는 스스로 느꼈던 불편함과 부끄러움을 혼자 감당하기 힘들다며 불특정 다수에게 퍼뜨리며 책임을 전가하는, 이처럼 무책임한 작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감 있게 해내고 말았다.



  • 목차

    • 들어가는 말 - 경계의 시간, 이름 없는 시절의 이야기

      1.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
      기숙사엔 유령이 산다
      너는 이해할 수 있을까
      여름 바다, 기타 소리
      업무일지 쓰는 마음
      하루 세 번 하늘 보기
      악산에도 꽃은 핀다
      나는 닫힌 문을 열고 싶다
      그냥, 돈 얘기
      이 거리가 조금 더 따뜻하기를

      2. 나는 그들을 외롭게 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풍경이었다
      업무의 뒤편
      끝나지 않는 장마가 오면
      나는 그들을 외롭게 두지 않을 것이다
      수치심에 대하여
      좋은 게 좋은 일
      마음의 일교차를 줄이는 방법
      삶이 흘러들어온다
      여름을 기다리며- 너에게 보내는 편지
      물거품의 가능성

      3. 누구의 삶도 함부로 버려지지 않기를
      심야식당의 손님들
      공부할 권리
      상식이 통하는 세상
      당신의 삶, 당신의 기억
      누구의 삶도 함부로 버려지지 않기를
      그건 나였을지 모른다
      돌아보는 날들- 너의 이야기
      죽음은 일상과 무관하지 않았다
      여전히 부끄러운 하루
      이름에게
      글을 쓸수록 약해진다

      해제 - 노동 현장의 ‘알음다움’에서 길어 올린 아름다움 (이성철 창원대 교수)



  • 저자 소개

    허태준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현장실습생을 거쳐 산업기능요원으로 지역 중소기업에서 3년 7개월간 근무했다. 일하는 청(소)년, 대학생이 아닌 이십대, 군인이 아닌 군 복무자로 살아가며 스스로를 소개하는 것조차 버거운 삶에 대해 고민했다. 회사를 그만둔 후 모든 삶은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자신이 보고 들었던 시절에 대해 쓰고자 했다. 여전히 방황하고, 때로는 아파하며, 오늘도 글을 쓰고 있다.

  • 🖋 책 속으로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리처럼 열아홉 살부터 일을 시작했을까. 어쩌면 그보다 더 빨리 돈을 벌어야 했을까. 왜 돈을 벌어야 했을까. 군대에 가지 않기 위해 산업기능요원으로 편입했을까. 불안했을까. 서러웠을까. 퇴근 후에는 뭘 했을까. 공부를 했을까. 힘들진 않았을까. 뭘 좋아했을까. 가족은, 친구는, 애인은 있었을까. 그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새벽 복도 끝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면. 당신은 안녕한지, 나는 정말로 물어보고 싶었다. - 22p

    너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기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반짝임이 남아 있는, 미래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들만을 꺾어 너를 응원하고 싶었다. 너는 분명 내가 된다.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고, 기계나 전자 같은 과목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시를 보면 가슴이 뛰고, 공책 빈자리에 수없이 많은 문장을 적어둘 것이다. 걸어가는 너의 뒷모습이 낯설어 보였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고맙다고 외치고 싶었다. - 30p

    하지만 가끔, ‘빨리 돈 벌어서 좋겠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로 인해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해야 했다. 시간을 지식으로도, 경험으로도, 새로운 기회로도 온전히 치환하지 못한 우리에게 돈을 빼면 뭐가 남는 걸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얼마나 공허한 마음으로 20대 중반으로 접어드는 걸까. - 77p

    문득 그 말이 떠올라 나는 맥주를 마시던 손을 멈췄다. 스물한 살 산업기능요원의 죽음을 다룬 기사에 달린 댓글. 나와 동갑이었을 누군가의 죽음을 보며 나는 자신에게 되묻고는 했다. 강해진다는 건 싸가지를 부리는 걸까. 자신이 상처 입지 않기 위해 남을 더 상처 입히는 사람이 되는 걸까. 강해진다는 건, 겨우 그런 걸까. - 110p

    누군가의 아픔을 진심으로 이해했을 때, 어쩌면 작가는 아무것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 할 수 있는 건 그저 ‘있는 그대로’의 무언가를 전하는 일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전할 수 있을까. 무엇을 쓸 수 있을까. 긴 시간을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잠 못 드는 밤을 넘어서야, 이제야 겨우 무언가를 쓰려고 한다. 나는 그들을 외롭게 두지 않을 것이다. - 117p

    아주 짧은 순간, 그 침묵 사이로 얼마나 많은 눈빛이 오고 갔는지 모두가 알았다. 우리의 표현이 암묵적인 동의라는 것도, 그가 의도적으로 그걸 무시했다는 것도, 그럼에도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사실을 이야기하지 못했다는 것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그 자리에 있던 아이 중 몇 명이나 눈치챘을까. 그 감정이 수치심이었다는 걸. 자신도 모르게 받았던 상처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자각하고 있었을까. - 123p

    그때를 돌아보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치열하게 습득한 지식이 아니라 매일 같이 나를 짓누르던 졸음이었다. 그래도 공장에서는 항상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거칠고 날카로운 기계 소음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긴장이 됐다. 하지만 가끔은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풀려 당황한 적도 많았다.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한 새벽에는 다음 날 출근이 겁이 났다. 지금 사고를 당하면 누구도 원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184p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육체의 피로를 견딜 수 있었던 건 우리에게 언제나 더 나은 삶에 대한 기대 같은 게 있기 때문이었다. 산업기능요원이 끝나면 다른 일을 할 수 있겠지. 경력을 인정받으면 더 좋은 회사로 옮길 수 있겠지. 마음만 먹으면 대학을, 여행을, 또는 분명치 않아도 가보지 못한 어떤 미래로 갈 수 있겠지. - 211p

    그 희미한 빛에 의지해서 나는 가끔, ‘사건’이란 용광로에 빠진 이름을 비춰보고는 한다. 매년 산업 현장에서 꺼져가는 2,000여 명의 이름.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 한 304명의 이름. 때로는 별자리가 되어 누군가의 미래를 밝히는 이름.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가까웠던, 숫자가 표현하지 못한 삶의 질량을 생각한다. 어쩌면 그래서 매일같이 마음이 무거워지는지도 모르겠다. - 252p

    하지만 내가 느끼는 아픔만은 진실일 것이다. 나만큼이나 당신이 아프다는 것도 진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에게 상냥하고 싶다. 조금 더 친절하고 싶다. 나는 당신이 상처받지 않도록 글을 쓸 것이다. 글은 내가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오해가 오해를 만들더라도, 그 속에서 영원히 아파한다고 해도, 우리가 마주 잡은 손은 따뜻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강해질 필요는 없다. 더 약해져도 괜찮다. 그저 부은 눈을 꼭 감은 채로, 당신이 긴 새벽을 견딜 수 있었으면 좋겠다. - 26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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