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0 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무심하게 영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영화가 끝나기 3분 전 내 가슴속에 거대한 폭풍우가 일어나고 말았다. 눈물범벅이 된 채로 비틀비틀 상영관을 빠져나왔다. 세상이 너무 밝았다. 바닥에 주저앉고 싶었다.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었다.
p.14 왜 예전엔 보지 못했을까. 무언가를 우적우적 씹어대던 빌리의 모습을, 진지한 회의 중에도 입속의 잔해를 거침없이 퉤 뱉어버리던 그의 태도를. 설득과 협상의 순간마다 그는 무언가를 입에 넣었다. 선수 시절 긴장을 풀기 위해 씹어대던 습관처럼, (…) 우적우적 씹고 뱉는 행동을 통해 그는 자신을 가로막는 반대와 싸우고 의심을 견뎌내고 있었다.
p.15 해외 한 번 나가보지 못한 청춘의 시기에 두 시간짜리 영화는 비행기 없이 떠날 수 있는 짧은 여행이었고, 스크린 너머 식탁에 놓인 익숙하면서도 낯선 음식들은 나아갈 방향을 일러주는 소중한 나침반이었다. 그 깨달음의 시간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보인다.
p.16 당신이 컴컴한 어둠 속에서 홀로 계단을 내려가야 할 때, 발을 헛디딜까 덜컥 겁이 날 때, 어둠 속에서 문을 열어야 할 때, 때로 그 문이 쉽게 열리지 않아 힘에 부칠 때, 안전하게 어둠을 통과하고 굳게 닫힌 문을 활짝 열 수 있도록 당신의 한 발 앞에서 도와주는, 당신 곁에 머무는 희미한 유도등 같은, 그런 책이 되기를 바라며.
p.31 카너의 엄마가 마시는 ‘블루 넌’ 또한 그녀의 삶을 투영한다. 수녀 그림이 라벨에 그려진 독일산 화이트와인 ‘블루 넌’은 당시 아일랜드에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 세 아이의 엄마가 된 그녀는 퇴근 후 저녁 무렵, 현관 앞에서 마지막 한 줌의 햇볕과 함께 와인을 마신다.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블루 넌’은 ‘와인 좀 마셔 본’ 사람들 사이에서는 촌스러운 와인으로 여겨지게 되지만, 그녀는 자신의 입맛을 더 고급 취향으로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이 와인은 그녀가 자신에게 허락한 유일한 사치였을 테니까.
p.42 난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자신을 막아서는 일이 생길 때마다 나츠메는 이렇게 외친다. (…) 조금 돌아가야 하는 모퉁이를 만날지언정 그걸 ‘벽’으로 오해하고 돌아서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p.52 이 뜨거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오이가 준비한 요리는 뜻밖에도 ‘징징이 국수’다. 그녀는 소시지와 노란 두부 같은 태국의 가정식 식재료를 꺼내놓는다. (…) 그 평범한 재료들이 웍 안에서 면과 함께 볶아지기 시작할 때, 불 위로 소환되는 것은 지워내고 싶은 가난이 아니라 사랑의 기억이다. 그녀는 조용히 미소 짓는다.
p.54 지금도 가끔은 궁금하다. 내 지갑이 더 두꺼웠다면, 내게 파인다이닝의 식탁에 몇 번 더 앉아 볼 기회가 있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그 맛을 즐기는 사람으로 성장했을지. 하지만 나는 오이처럼 회귀의 서사를 택했다. 화려한 미식의 세계가 아닌 우리 집 가정식에서, ‘보통의 식사’에서부터 출발해 나의 세계를 창조해보고 싶어졌다.
p.62 우리 모두는 철판 위에 줄줄이 짜놓은 에클레어 반죽 같다. 언뜻 보기에 비슷한 듯 보여도 조금씩 길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서로 다른 모습으로 부풀어 각기 다른 맛으로 속을 채운다.
p.65 슈 반죽을 잘 굽기 위해선 충분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제대로 부풀지 못하고 주저앉은 슈에는 아무런 속도 채울 수가 없다. 꿈을 향한 여정도 그렇지 않을까. 초조함과 성급함이 앞서면 주저앉기 십상인 이 길.
p.84 그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어 영화 초반의 장면을 몇 번이나 되돌려 봤는지 모르겠다. 편의점에서 통조림을 뒤지는 그의 손을 보고, 편의점 직원과 주고받는 대화를 보고, 격분해서 소리치는 그의 얼굴을 보고. 그렇게 장면 하나하나를 다시 되돌려 보고 또 되돌려 보았을 때, 그러다 어느 순간 그의 대사 속에서 ‘파인애플 통조림’이란 글자가 흐릿해지고 빈자리에 ‘사랑’이란 단어가 채워졌을 때, 그때 나의 마음은 절절해졌다.
p.87 화려한 불빛 뒤에 가려진 어느 골목 어둑한 집 안에는 여전히, 사랑의 유통기한에 가슴 졸이는 청춘들이 있을 것이다. 사랑의 유통기한이 만년이기를 감히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통조림처럼 외면당한 우리의 마음이 부디 안녕하길. 유통기한의 밤이 지나, 거부할 수 없는 아침 해가 밝아오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p.104 우리 부부의 아침 식탁에 오르는 윤기 나는 밥 한 그릇, 공기에 소복이 담긴 밥의 형태는 갓 떠오르는 해처럼 둥글다. 공교롭게도, 〈호프 스프링즈〉 속 아놀드가 즐겨 먹는 달걀 프라이 또한 아침 해와 같다. 영어로 ‘써니 사이드 업(sunny side up)’. 노른자를 터뜨리지 않고 한 면만 구운 모양이 꼭 둥근 해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p.114 I know. 이 말은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그것이 지금 나의 마음에도 있음을 알리는 표현이다. 그러니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다. 설명하려 애쓸 필요 없다. 입을 통해 나눴던 무수한 맛과 말들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둘 사이를 단단히 묶어 주었다.
p.125 치킨과 블루 루인 칵테일, 편육과 막걸리가 놓인 식탁에 둘러앉아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의 기억을 꼭꼭 음미하다 보면, 우리는 실감하게 될지도 몰라요. 이건 결코 지울 수 없는 종류의 맛이라는 사실을요.
p.145 어린 스즈는 아직 마시지 못하는 매실주. 큰언니의 해물 카레와 셋째 언니의 치쿠와 카레. 스즈가 이미 아버지로부터 배운 적 있는 잔멸치 토스트. 자매들은 서로의 ‘다름’을 보여주는 그러한 음식을 함께 먹음으로써, 경험하지 않은 기억마저 공유할 수 있는 진정한 식구(食口)가 되어 간다.
p.167 내게 여성의 삶이란 다 풀지 못한 숙제다. 나는 어떤 곳에서, 어떤 형태의 열매가 되어, 그 속에 어떤 시간을 가두면서, 어떤 빛깔로 익어가야 하는 것일까. 〈그린 파파야 향기〉에서 느껴지는 싱그럽고 풋풋한 시절은 이미 지나왔고, 〈프렌치 수프〉가 표현하는 잘 정제된 맑은 수프 같은 무르익음의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의 나는, 주방 견습생처럼 외제니의 몸짓 하나하나를 눈으로 쫓으며 내 삶을 요리하는 법을 배워갈 수밖에.
p.195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마지막, 무니는 친구의 손에 이끌려 디즈니월드로 달려 나간다. 어린 두 소녀의 뒷모습을 카메라가 쫓아가는 이 장면은, 사실 디즈니 측의 촬영 허가를 받지 못해 아이폰으로 찍은 것이라고 한다. 감독의 의지가 내게 말하는 것 같다. 가끔은 그렇게, 영상이 튈 걸 각오해서라도 어떻게든 찍고, 다시 이어 붙여야만 완성되는 이야기도 있는 법이라고.
p.238 그럼에도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매 듯이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던 날들이 있었다. 숲과 계곡이 우거진 자연, 무더운 여름과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 공존하는 땅. PCT를 횡단하는 셰릴의 여정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득하고 막막한 이 회색빛 도시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기 위해 끝내 완전히 주저앉지는 않고 다시 일어서던 날들이 있었다.
어둠 속 한 줌의 팝콘처럼
영화가 끝나도 사라지지 않는 한 컷의 울림, 한 입의 기억
도서 소개
“마침내 우리가 보게 될 해피엔딩을 기대하며”
삶의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당신에게,
영화 속 음식이 건네는 위로의 불빛을 따라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간 청춘이 전하는 삶의 레시피
『어둠 속 한 줌의 팝콘처럼』은 영화와 음식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섬세하게 기록한 감성 에세이다. 저자는 스크린 속 인물들이 먹고 마시는 장면을 집요하게 바라보며, 그 안에 숨은 감정과 태도를 자신의 삶과 겹쳐 읽어낸다. 빌리가 회의 중에도 무언가를 씹어대는 이유를 통해 불안을 견디는 방식을 발견하고, 나츠메의 “난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라는 외침에서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떠올린다.
이 책의 미덕은 솔직함에 있다. 계획 없이 흘러온 시간,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던 순간, 영화가 끝나기 직전 갑작스레 밀려온 눈물까지, 저자는 자신의 취약한 시절을 숨기지 않는다. 대신 그 시간들을 음식처럼 천천히 음미하며, 삶이란 결국 수없이 흔들리면서도 다시 식탁 앞에 앉는 일임을 보여준다. 저자가 영화관 아르바이트생 시절 이미 느꼈듯이 새로운 영화는 또 시작되고, 삶의 주인공으로서 우리가 봐야 할 진짜 엔딩은 아직 남아 있으므로.
누구에게나 인생에는 예고편과 엔딩 크레딧이 있고, 그 사이의 식탁 위에서 우리는 조금씩 성장한다. 『어둠 속 한 줌의 팝콘처럼』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있는 이들에게 말한다. 이 어둠 속에서는 울어도 괜찮고, 영화가 끝나면 다시 빛을 향해 나아가도 된다고. 한 컷의 울림과 한 입의 기억이 모여 만든 소박하지만 따뜻한 한 접시의 위로가 독자의 마음을 슬며시 어루만진다.
목차
어둠 속에서 두려움을 감추고, “Just enjoy the show.” | 〈머니볼〉 속 ‘빌리’가 우적우적 씹는 이유는 06
[Act.Ⅰ] 덜 익어서 더 눈부신 청춘의 반짝임
scene #1. 취하지 않고도 꿈꿀 수 있는 용기 | 〈싱 스트리트〉 속 홍차와 비스킷 25
scene #2. 삶의 길모퉁이에서 난 도망치지 않아 | 〈양과자점 코안도르〉 속 가나슈 케이크와 ‘르나르’ 36
scene #3. 어떤 불길은 허기를 달래고 | 〈헝거〉 속 ‘징징이 국수’ 46
scene #4. 아직은 그저 조금씩 채워갈 뿐이야 |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 속 에클레어 57
scene #5. 영화로운 레시피①: 식빵 들고 우리 집에 놀러 와 | 〈내니 다이어리〉 속 ‘애니’에게 67
[Act.Ⅱ] 흔들림 속에 깊어지는 사랑의 향기
scene #6.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 〈중경삼림〉 속 파인애플 통조림 79
scene #7. 내 몸이 누군가의 온기를 원할 때 | 〈딜리셔스〉 속 크루스타드 88
scene #8. 오늘도 식탁엔 아침 해가 떠오르고 | 〈호프 스프링즈〉 속 달걀 프라이와 베이컨 96
scene #9. 우리가 함께 나눈 말, 함께 나눌 맛 | 〈줄리 & 줄리아〉 속 버터 106
scene #10. 영화로운 레시피②: 망각의 술잔을 높이 든 그대여 | 〈이터널 선샤인〉 속 ‘조엘’에게 117
[Act.Ⅲ] 그녀의 부엌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scene #11. 후루룩, 그 소박한 한 가닥에 담긴 마음 | 〈사랑의 레시피〉 속 토마토 스파게티 129
scene #12. 가족이 된다는 것, 식구가 된다는 것 | 〈바닷마을 다이어리〉 속 잔멸치 덮밥과 매실주 139
scene #13. 좋아하는 일을 손에 꼬옥 쥘 수 있다면 | 〈굿모닝 맨하탄〉 속 라두 149
scene #14. 아름다운 접시와 고요한 불 사이에서 | 〈프렌치 수프〉 속 서양배 디저트와 ‘터봇’ 요리 159
scene #15. 영화로운 레시피③: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해 | 〈브리짓 존스의 일기〉 속 ‘브리짓’에게 169
[Act.Ⅳ] 지나온 후에야 더해지는 양념 하나
scene #16. 1℃만 더해도 이 마음은 녹아내릴 텐데 | 〈소주와 아이스크림〉 속 소주와 ‘투게더’ 181
scene #17. 우리가 살았던 무지갯빛 궁전을 기억해 | 〈플로리다 프로젝트〉 속 호텔 조식 190
scene #18. 그녀는 정말 다신 스튜를 안 먹었을까 | 〈브루클린〉 속 양고기 스튜 200
scene #19. 내가 소유하고 싶은 단 하나의 풍경은 | 〈소공녀〉 속 ‘글렌피딕’ 위스키 210
scene #20. 영화로운 레시피④: 우리를 견디게 할 마법의 주문 | 〈체리 향기〉 속 ‘바디’에게 220
[End Credits]
이제, 빛을 향해 나아갈 시간 | 〈와일드〉 속 차가운 오트밀죽 230
저자 소개
김미양
수면양말 신고 귤 까먹으며 보는 영화가 좋은 집순이 내향인.
〈브루클린〉 속 ‘에일리스’처럼 섬을 떠나 닿은 도시에서 컴컴한 시간 속에 허우적거리다 어느새 삼십 대의 끝자락까지 왔다.
몇 번의 NG 끝에 다시 찾은 꿈은 ‘음식’과 ‘기억’을 ‘기록’으로 잇는 일. 2021년에는 가족과의 아리고도 따스한 추억이 담긴 에세이집 『입가에 어둠이 새겨질 때』를 출간하고, 2025년에는 고향 제주의 메밀 식문화를 기록한 단편 다큐멘터리 〈메밀, 섬의 안녕을 기원하다〉를 제작했다.
〈양과자점 코안도르〉 속 ‘나츠메’처럼 사랑스러운 파티쉐도 〈프렌치 수프〉 속 ‘외제니’처럼 멋진 셰프도 되지 못했지만, 〈줄리 & 줄리아〉 부럽지 않은 영혼의 동반자는 만났으니, 이 영화, 새드엔딩은 아닐 모양이다. 다음 쇼트가 기다려진다.
🖋 책 속으로
p.10 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무심하게 영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영화가 끝나기 3분 전 내 가슴속에 거대한 폭풍우가 일어나고 말았다. 눈물범벅이 된 채로 비틀비틀 상영관을 빠져나왔다. 세상이 너무 밝았다. 바닥에 주저앉고 싶었다.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었다.
p.14 왜 예전엔 보지 못했을까. 무언가를 우적우적 씹어대던 빌리의 모습을, 진지한 회의 중에도 입속의 잔해를 거침없이 퉤 뱉어버리던 그의 태도를. 설득과 협상의 순간마다 그는 무언가를 입에 넣었다. 선수 시절 긴장을 풀기 위해 씹어대던 습관처럼, (…) 우적우적 씹고 뱉는 행동을 통해 그는 자신을 가로막는 반대와 싸우고 의심을 견뎌내고 있었다.
p.15 해외 한 번 나가보지 못한 청춘의 시기에 두 시간짜리 영화는 비행기 없이 떠날 수 있는 짧은 여행이었고, 스크린 너머 식탁에 놓인 익숙하면서도 낯선 음식들은 나아갈 방향을 일러주는 소중한 나침반이었다. 그 깨달음의 시간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보인다.
p.16 당신이 컴컴한 어둠 속에서 홀로 계단을 내려가야 할 때, 발을 헛디딜까 덜컥 겁이 날 때, 어둠 속에서 문을 열어야 할 때, 때로 그 문이 쉽게 열리지 않아 힘에 부칠 때, 안전하게 어둠을 통과하고 굳게 닫힌 문을 활짝 열 수 있도록 당신의 한 발 앞에서 도와주는, 당신 곁에 머무는 희미한 유도등 같은, 그런 책이 되기를 바라며.
p.31 카너의 엄마가 마시는 ‘블루 넌’ 또한 그녀의 삶을 투영한다. 수녀 그림이 라벨에 그려진 독일산 화이트와인 ‘블루 넌’은 당시 아일랜드에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 세 아이의 엄마가 된 그녀는 퇴근 후 저녁 무렵, 현관 앞에서 마지막 한 줌의 햇볕과 함께 와인을 마신다.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블루 넌’은 ‘와인 좀 마셔 본’ 사람들 사이에서는 촌스러운 와인으로 여겨지게 되지만, 그녀는 자신의 입맛을 더 고급 취향으로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이 와인은 그녀가 자신에게 허락한 유일한 사치였을 테니까.
p.42 난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자신을 막아서는 일이 생길 때마다 나츠메는 이렇게 외친다. (…) 조금 돌아가야 하는 모퉁이를 만날지언정 그걸 ‘벽’으로 오해하고 돌아서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p.52 이 뜨거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오이가 준비한 요리는 뜻밖에도 ‘징징이 국수’다. 그녀는 소시지와 노란 두부 같은 태국의 가정식 식재료를 꺼내놓는다. (…) 그 평범한 재료들이 웍 안에서 면과 함께 볶아지기 시작할 때, 불 위로 소환되는 것은 지워내고 싶은 가난이 아니라 사랑의 기억이다. 그녀는 조용히 미소 짓는다.
p.54 지금도 가끔은 궁금하다. 내 지갑이 더 두꺼웠다면, 내게 파인다이닝의 식탁에 몇 번 더 앉아 볼 기회가 있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그 맛을 즐기는 사람으로 성장했을지. 하지만 나는 오이처럼 회귀의 서사를 택했다. 화려한 미식의 세계가 아닌 우리 집 가정식에서, ‘보통의 식사’에서부터 출발해 나의 세계를 창조해보고 싶어졌다.
p.62 우리 모두는 철판 위에 줄줄이 짜놓은 에클레어 반죽 같다. 언뜻 보기에 비슷한 듯 보여도 조금씩 길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서로 다른 모습으로 부풀어 각기 다른 맛으로 속을 채운다.
p.65 슈 반죽을 잘 굽기 위해선 충분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제대로 부풀지 못하고 주저앉은 슈에는 아무런 속도 채울 수가 없다. 꿈을 향한 여정도 그렇지 않을까. 초조함과 성급함이 앞서면 주저앉기 십상인 이 길.
p.84 그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어 영화 초반의 장면을 몇 번이나 되돌려 봤는지 모르겠다. 편의점에서 통조림을 뒤지는 그의 손을 보고, 편의점 직원과 주고받는 대화를 보고, 격분해서 소리치는 그의 얼굴을 보고. 그렇게 장면 하나하나를 다시 되돌려 보고 또 되돌려 보았을 때, 그러다 어느 순간 그의 대사 속에서 ‘파인애플 통조림’이란 글자가 흐릿해지고 빈자리에 ‘사랑’이란 단어가 채워졌을 때, 그때 나의 마음은 절절해졌다.
p.87 화려한 불빛 뒤에 가려진 어느 골목 어둑한 집 안에는 여전히, 사랑의 유통기한에 가슴 졸이는 청춘들이 있을 것이다. 사랑의 유통기한이 만년이기를 감히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통조림처럼 외면당한 우리의 마음이 부디 안녕하길. 유통기한의 밤이 지나, 거부할 수 없는 아침 해가 밝아오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p.104 우리 부부의 아침 식탁에 오르는 윤기 나는 밥 한 그릇, 공기에 소복이 담긴 밥의 형태는 갓 떠오르는 해처럼 둥글다. 공교롭게도, 〈호프 스프링즈〉 속 아놀드가 즐겨 먹는 달걀 프라이 또한 아침 해와 같다. 영어로 ‘써니 사이드 업(sunny side up)’. 노른자를 터뜨리지 않고 한 면만 구운 모양이 꼭 둥근 해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p.114 I know. 이 말은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그것이 지금 나의 마음에도 있음을 알리는 표현이다. 그러니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다. 설명하려 애쓸 필요 없다. 입을 통해 나눴던 무수한 맛과 말들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둘 사이를 단단히 묶어 주었다.
p.125 치킨과 블루 루인 칵테일, 편육과 막걸리가 놓인 식탁에 둘러앉아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의 기억을 꼭꼭 음미하다 보면, 우리는 실감하게 될지도 몰라요. 이건 결코 지울 수 없는 종류의 맛이라는 사실을요.
p.145 어린 스즈는 아직 마시지 못하는 매실주. 큰언니의 해물 카레와 셋째 언니의 치쿠와 카레. 스즈가 이미 아버지로부터 배운 적 있는 잔멸치 토스트. 자매들은 서로의 ‘다름’을 보여주는 그러한 음식을 함께 먹음으로써, 경험하지 않은 기억마저 공유할 수 있는 진정한 식구(食口)가 되어 간다.
p.167 내게 여성의 삶이란 다 풀지 못한 숙제다. 나는 어떤 곳에서, 어떤 형태의 열매가 되어, 그 속에 어떤 시간을 가두면서, 어떤 빛깔로 익어가야 하는 것일까. 〈그린 파파야 향기〉에서 느껴지는 싱그럽고 풋풋한 시절은 이미 지나왔고, 〈프렌치 수프〉가 표현하는 잘 정제된 맑은 수프 같은 무르익음의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의 나는, 주방 견습생처럼 외제니의 몸짓 하나하나를 눈으로 쫓으며 내 삶을 요리하는 법을 배워갈 수밖에.
p.195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마지막, 무니는 친구의 손에 이끌려 디즈니월드로 달려 나간다. 어린 두 소녀의 뒷모습을 카메라가 쫓아가는 이 장면은, 사실 디즈니 측의 촬영 허가를 받지 못해 아이폰으로 찍은 것이라고 한다. 감독의 의지가 내게 말하는 것 같다. 가끔은 그렇게, 영상이 튈 걸 각오해서라도 어떻게든 찍고, 다시 이어 붙여야만 완성되는 이야기도 있는 법이라고.
p.238 그럼에도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매 듯이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던 날들이 있었다. 숲과 계곡이 우거진 자연, 무더운 여름과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 공존하는 땅. PCT를 횡단하는 셰릴의 여정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득하고 막막한 이 회색빛 도시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기 위해 끝내 완전히 주저앉지는 않고 다시 일어서던 날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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